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브 생 로랑 (문단 편집) === 디올 시절 === 1953년, 생 로랑은 국제 울 사무국이 주관하는 ‘젊은 패션 디자이너 공모전’에 3개의 스케치를 제출했고, 생 로랑은 이 공모전에서 3등을 차지했다. 이 시기에 생 로랑은 [[파리(프랑스)|파리]]에서 머무는 동안 당시 프랑스 [[보그(패션지)|보그]]의 편집장이었던 미셸 브루노프를 만나게 된다. 재능있는 새로운 디자이너들을 발굴하고 잘 지원해주는 인물로 알려졌던 미셸 브루노프는 생 로랑이 가지고 온 스케치에 깊은 감명을 받게되고 '제대로 [[패션 디자이너]]가 돼보는 것이 어떻겠냐'고 제안하게 된다. 생 로랑은 결국 그의 충고를 따르기로 하고 파리 의상 조합 학교에 입학하게 된다. 그곳에서부터 그의 디자인은 여러 사람들에게 금방 주목받게 되었으나, 몇 달 만에 그만두었다. 1954년, 다시 국제 울 사무국 주관 콘테스트에 참가해 친구였던 페르난도 산체스와 당시 독일 출신의 젊은 유학생이었던 [[칼 라거펠트]]를 제치고 1등을 차지한다.[* 참고로 [[칼 라거펠트]]는 ‘드레스’ 부문에서 2위, ‘코트’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.] 생 로랑은 우승 직후 몇 장의 스케치들을 미셸 브루노프에게 가져다주었는데, 브루노프는 [[크리스티앙 디오르|크리스챤 디올]]이 그날 아침 자신에게 보여준 스케치와 생 로랑의 스케치 사이에 밀접한 유사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. 그는 '''곧바로 생 로랑을 디올과 만나게 했으며 디올은 그 자리에서 즉시 생 로랑을 고용하기에 이른다.''' '''디올은 생 로랑의 천부적인 재능을 금방 알아보긴 했으나''' 생 로랑은 디올 하우스에서 직접적인 디자인보다는 스튜디오를 장식하고 액세서리를 디자인하는 등 일상적인 작업을 하며 '''디올의 밑에서 조수로서 1년을 보내게 된다.''' 하지만 '''생 로랑'''은 곧 '''크리스챤 디올'''의 [[오트쿠튀르]] 컬렉션에 대한 스케치를 본격적으로 제출할 수 있게 되었고, 매 시즌이 지날 때마다, 디올은 이전보다 더 많은 생 로랑의 스케치들을 수용했다. 1957년 8월, 디올은 생 로랑의 어머니를 직접 만나 ‘나의 뒤를 이을 디자이너로 생 로랑을 선택했다’고 그녀에게 말했다. 이 말을 듣게 된 생 로랑의 어머니는 당시 디올이 52세에 불과했던 터라 ‘벌써 후계자를 선정한다고?’라며 의아해했다고 한다. 그러나 그 해 10월, 디올이 이탈리아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을 때 생 로랑과 그의 어머니는 충격을 금치못하게 된다. '''크리스챤 디올이 사망하자 생 로랑은 21세의 젊은 나이에 디올 하우스의 수석 디자이너 자리를 맡게 된다.''' 생 로랑의 1958년 봄 컬렉션은 크리스챤 디올이 재정적인 위험으로부터 달아날 수 있었던 계기가 된다. 생 로랑은 이 컬렉션에서 디올의 '뉴룩'의 소프트한 버전인 "트라페즈 드레스"라는 창작물을 발표하게되고, 이 드레스는 생 로랑을 국제적인 스타덤에 올라가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해주었다. 이 컬렉션에 포함된 다른 드레스들은 거의 모두 어깨가 좁고 아래쪽에서 부드럽게 펄럭이는 형태의 디자인이었다. 이 시기에 그는 그의 이름을 '생 로랑'으로 줄였다. 왜냐하면 국제 언론들이 자신의 이름을 철자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. 이후 1958년 가을 컬렉션에서는 호블 스커트와 비트닉(Beatnik) 패션이 돋보이는 쇼를 선보였으나, 그의 첫 컬렉션과 같은 수준의 찬사를 받지는 못했으며 오히려 혹평을 받게 된다. 이 컬렉션은 의도치 않게 생 로랑에게 디올에서의 마지막 컬렉션으로 남는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